[Daum책] 사랑손님과 어머니 http://durl.me/7i7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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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희는 어머니와 외삼촌과 함께 살았다. 옥희의 아버지께서는 옥희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다. 옥희가 유치원에서 돌아오니까 사랑에서 큰외삼촌이 낯선 아저씨를 데려 왔다.
그 아저씨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친구였다. 옥희는 잘해 주는 아저씨가 좋았다. 옥희는 아저씨가 아빠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아저씨는 그 말을 듣고 아저씨는 얼굴이 빨개 졌다. 옥희는 유치원에서 꽃을 몰래 가져와 어머니에게 주려고 하였지만 어머니께 유치원에서 훔쳐 왔다는 말을 못하고 그만 사랑 아저씨가 엄마에게 가져다 주라고 말하고 말았다. 그 말을 듣고 엄마도 얼굴이 발개져 얼른 꽃을 꽃병에 담았다.
그날 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한 번도 친 적이 없는 풍금을 쳤다. 어머니는 사랑 손님 때문에 마음이 어지러웠다. 그리고 아저씨는 옥희에게 인형 하나를 주고 기차를 타고 떠났다. 옥희와 어머니는 떠나는 기차를 내려다 보았다.
나는 이 책이 어린이의 관점으로 쓰여 진 것이 특별했다. 그리고 어머니와 사랑 손님이 서로 좋아하지만 그 때에는 여자가 재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서로 표현하지 못한 것을 보고 그때에는 여자가 재혼을 하면 욕을 먹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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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희는 과부인 어머니의 하나뿐인 딸로서 이 소설에서는 관찰자이자 서술자이다. 옥희는 어머니와 외삼촌과 같이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동리 학교 교사로 온 아저씨가 사랑방에 하숙을 하게 된다. 옥희는 아저씨를 좋아하게 되고 아저씨가 아빠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을 아저씨에게 말씀했더니 아저씨는 ‘못쓴다’ 라고 옥희에게 떨린 체로 말한다. 그리고 유치원에서 꽃을 꺾어 어머니에게 아저씨가 드리라고 말씀하셨다며 거짓말을 하자 어머니의 얼굴이 빨개 진다.
며칠 후, 아저씨는 아쉬움을 남긴 채 옥희의 집을 떠나 버린다. 어머니와 옥희는 떠나가는 아저씨를 보며 아쉬움을 달래고 그 후부터 어머니는 풍금을 다시 키시지 않고 옥희가 좋아하는 계란도 사지 않으신다.
느낀 점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루어질 수 없는 어머니와 아저씨의 사랑이 안타까웠다. 과부인 옥희의 어머니는 이 시대 형편으로써는 재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서로를 멀리하려고 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 아저씨가 계란을 좋아한다는 말에 계란도 많이 사고 그가 원하는 것을 최대한 많이 해 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아저씨는 옥희가 자기에게 한 말을 듣고 당황하고 옥희의 집을 떠날 때 아쉬움을 느낀다. 이 소설의 배경이 조선 시대쯤인 걸로 보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요즘이야 자신의 감정을 숨김없이 표현해도 되지만 조선 시대에는 아무래도 이런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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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저번 국어 시간에 선생님께서 프린트 해주신 사랑 손님과 어머니를 읽었다. 그 이야기는 소설로 1인칭 시점이었다. 관찰자는 어머니의 딸인 옥희다.
줄거리 - 옥희의 아버지는 옥희가 태어나기 1달 전에 돌아가셨다. 그래서 옥희는 아버지가 없이 어머니와 함께 살아왔고 사람들은 옥희를 유복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어느 날 외삼촌과 살던 중 아버지의 친구분이 옥희네 집에서 같이 머물게 되었다. 그 친구분이 바로 사랑 손님이다.
옥희와 친하게 지내던 사랑 손님은 어느 날부터 옥희의 어머니에게 관심이 갔고 결국에 사랑하게 되었는데 그 시대에는 결혼한 여자가 이혼하거나 남편이 죽었을 때, 다른 남자와 결혼하거나 만나면 바람 핀다 라고 뜻하기에 몰래 옥희를 이용해 식사값과 함께 러브 레터를 보내지만 옥희 어머니가 자신을 차자 다시 어딘가로 떠났다고 한다.
느낀 점 - 나는 이 이야기를 읽고 그 시대의 생각이 맘에 안 든다. 솔직히 이미 남편이 죽고 딸 하나에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가 있다는데 왜 다시 재혼을 못한다는 것인가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어머니의 입장에서도 생각해야 한다고는 생각해서 그렇게 좋지도 나쁘지도 않게 생각했다.
이 이야기는 6살짜리 아이의 시점에서 쓰기에 나는 왠지 모르게 옥희의 생각에 공감이 많이 들 정도로 재미있었다. 또한 영상으로 보았는데도 왜 그렇게 다시 공감 또 공감이 되는지 정말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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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이야기는 옥희의 어머니와 사랑방 손님의 이루어지지 못한 슬픈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이다.
이 이야기에서는 옥희의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옥희와 옥희의 엄마가 혼자 사는데 어느 날 어느 아저씨가 옥희의 집에서 하숙을 하게 된다. 그들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옥희는 그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 옥희는 아직 어리기 때문이다. 나는 처음에는 옥희의 엄마와 아저씨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였다. 하지만 점차 알게 되었다. 어느 날 옥희가 아저씨께서 진지를 드시고 있는데 사랑방으로 놀러 가자 아저씨가 너의 얼굴을 엄마처럼 곱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계속 옥희의 엄마에 대해서만 말한다. 그리고 아저씨가 옥희에게 너는 어느 반찬을 좋아하니 라고 말하였다. 삶은 계란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아저씨가 삶은 계란을 주었다. 그러자 옥희가 아저씨는 어느 반찬을 좋아하냐고 물었다. 아저씨도 삶은 계란이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옥희는 엄마에게 말을 하였다. 아저씨가 삶은 계란을 좋아한다고 말이다. 그러자 어머니는 삶은 계란을 많이 사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어머니가 아저씨를 좋아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어느 날 옥희는 교회에서 사랑방 아저씨를 보았는데 아저씨가 두리번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아저씨가 옥희의 엄마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어느 날 아저씨가 어머니에게 이것을 어머니에게 가져다 드리라고 하였다. 어머니가 그 것을 열어 보고 얼굴이 빨개 졌다.
아마도 그것은 연애 편지일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안 된다고 고백을 거절하였다. 나는 아마도 그 이유는 마을 사람들의 비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저씨는 짐을 싸고 떠난다. 나는 이 이야기는 정말로 슬프다고 생각한다. 마을 사람들의 비난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옥희의 어머니가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마을의 규칙을 지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옥희의 어머니가 참을성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옆에 두고 마을의 규칙을 지켰기 때문이다. 나도 이런 상황이라면 옥희 엄마같이 동했을 것이다. 내 생각에도 마을의 규칙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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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손님과 어머니는 주로 옥희, 옥희 엄마, 사랑방 아저씨가 나오는 이야기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긴 옥희네는 옥희, 옥희 엄마, 외삼촌이 같이 사는데 어떤 아저씨가 사랑방 손님으로 오는 것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 사랑방 손님은 옥희의 아버지의 친구이다. 사랑방 손님은 옥희와 친해 지기 위해 옥희가 좋아하는 음식을 물어 봤을 때 삶은 달걀이라고 한다. 그런데 옥희 엄마가 그 말을 옥희에게 전해들은 이후부터 삶은 달걀을 많이 사 온다. 이 것으로 옥희 엄마가 사랑방 손님에게 호감이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옥희 엄마는 봉건적 풍습 사이에서 갈등을 느낀다. 옥희 엄마와 사랑방 손님은 서로에게 호감이 있는 걸 알 수 있다. 옥희와 사랑방 아저씨가 함께 뒷동산에 올라가는데 옥희는 아저씨께 자기 아빠였으면 좋겠다고 한다. 근데 사랑방 아저씨는 당황해서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고 해서 옥희는 울었다.
일요일마다 옥희와 옥희 엄마는 일요일마다 예배당에 간다. 그런데 원래는 사랑방 아저씨는 예배당에 가지 않는데 옥희가 일요일마다 예배당에 엄마와 함께 간다는 소리를 듣고 예배당에 온다. 어머니는 예배당에 있는 사랑방 아저씨를 보고 부끄러워 앞만 향하여 바라본다. 하지만 어린 옥희는 그 행동들이 어머니와 사랑방 아저씨가 서로 화난 일이 있는 줄 안다.
어느 날 옥희는 엄마를 놀래 주기 위해 벽장 속에 숨었다가 잠이 들었다. 엄마와 옥희의 할머니는 옥희가 없어 진 줄 알고 한참을 찾았다. 옥희의 엄마는 옥희를 찾고 울면서 옥희 하나면 된다고 말한다. 이 걸로 사랑방 아저씨를 잊으려고 노력하는 걸 알 수 있다.
또 옥희가 어머니에게 사랑방 아저씨가 꽃을 갖다 주라고 하며 꽃을 전해 줬을 때 갈등이 심화된다.
하지만 옥희 엄마는 봉건적 풍습 즉 남편이 죽은 아내는 다시 재혼을 하면 안되고 또 그 사람이 남편의 절친한 친구이기에 그러면 안 된다고 결심, 또 결심을 한다. 그래서 사랑방 아저씨께 손수건, 즉 이별을 고한다. 결국 사랑방 아저씨는 떠나는 걸로 결말을 짓는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아주 유명한 소설이다. 안타까우면서도 슬픈 이야기이다. 사회와 사랑 중 갈등을 하는 옥희 엄마가 아주 안쓰러워 보였다. 나라면 사랑을 택할 것 같다. 아무래도 지금 시대니까 그런가? 그때 시대라면 옥희 엄마처럼 행동했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옥희 엄마가 조금만 더 적극적이었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옥희의 입장에서 관찰을 하면서 소설을 순수하고 아이러니하게 나타내서 읽기도 편하고 재미있고 내가 상상을 하는 부분이 많아서 더욱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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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를 처음 접한 것은 아마 여덟 살 즈음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 당시에는 어린이용으로 짤막하게 편집되어 생략된 부분도 많고 전체적인 줄거리만 조금 나온 얇은 책이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 제목을 다시 접한 것은 얼마 전 국어 시간. 선생님께서는 앞을 대비해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시며 몇 작품을 추천해 주셨다. 그 추천 작품 중에 사랑 손님과 어머니라는 제목이 또렷하게 들리는 것이 아닌가. 집에 간 나는 한국 문학 작품집을 뒤져서 이 소설을 다시 만났다.
여섯 살 난 꼬마 옥희가 바라보는 시점에서 쓴 이야기. 여기서 옥희는 매개자이며 관찰자이다. 어린 옥희의 눈으로 보는 세상은 어른들과는 현저히 다르다. 무심코 던진 사랑방에 있는 아저씨가 아빠였으면 좋겠다는 말에 얼굴이 붉어지는 아저씨는 이상하게 보일 뿐이다. 유치원에서 가지고 온 꽃을 아저씨가 주라고 했다고 하자 어머니는 당혹스러워서 그 이야기를 아무한테도 발설하지 말라고 한다. 옥희는 순진하게도 거짓말을 한 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자기한테 화를 내는 것보다는 아저씨한테 내는 편이 나으니까.
그러면서도 그 꽃을 간직하는 어머니가 옥희의 눈에는 의아할 뿐이다. 그리고 예배당에서 두 남녀가 보인 부끄러움의 정서가 옥희의 눈에는 단순히 화가 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옥희를 통해 어머니를 보는 아저씨가 이것저것 질문하자 귀찮게 쓸데없는 말을 한다고 생각한다. 어린이다운 사고방식이자, 아직 세상을 잘 몰라 자기가 아는 좁은 감정의 범위에서만 느끼는 것이 잘 드러난 예시이다.
흰 봉투와 손수건이 옥희를 통해 오가며 젊은 두 남녀는 연정을 키워 나간다. 서로 직접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한 적은 없지만, 옥희라는 인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서로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아저씨 쪽에서 사랑을 고백하기에 이르나, 그 시대 상황으로 보아 인정받기 어려운 일이다. 본문에 직접적으로 등장한 것은 아니지만, 그 당시의 사회적인 벽이 확실히 느껴 졌다.
보수적인 어머니는 떠나 주기를 요청하고, 그가 떠난 후에 풍금도 닫고 꽃도 내다 버리며 마음을 정리하는 체념적인 모습을 보인다. 사실은 매우 애달픈 장면이지만, 어리고 순진한 옥희의 시선에서 전개되는 바람에 저런 일이 아주 표면적인 행동과 옥희의 생각으로만 간추려 져 있다.
귀여운 말투로 이어지는 옥희의 서술 안에 숨겨 진 두 남녀의 애정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여자의 재혼을 불건전한 것으로 보는 암묵적인 시대적 사고방식 때문에 맺어 지지 못했던 두 사람. 요즘이야 이혼이나 재혼이 두 사람의 합의만 있으면 당연한 것으로 여겨 지는 세상이 오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이혼은 고사하고 재혼조차 쉽게 허용하지 못하는 완고한 관습의 벽이 있었다.
더군다나 옥희의 어머니는 여섯 살 난 아이까지 딸린 과부였기에 더욱 그렇다. 만일 옥희에게 아버지가 또 생긴다면, 어머니의 대사에서 엿볼 수 있듯이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고 옥희가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 되어도 좋지 못한 시선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얼마나 가혹한 세상이었단 말인가. 요새 아이 양육권 때문에 이혼을 꺼린다거나 서로 아이가 딸려 있는데 그럼 어머니 쪽 호적이 동거인으로 되기 때문에 재혼해서도 불이익을 받아 고민하는 부부들과는 미묘하게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다.
문득 이러한 생각을 해 보았다. 시대적 배경이 현재였다면, 이 이야기는 과연 어떤 방향으로 흘렀을까? 그랬다면 두 사람은 쉽게 맺어 졌을 것이다. 적어도 이 작품에서처럼 서로 내외를 한다거나 옥희를 통해 서로에 대한 연정을 한 겹씩 쌓아 가는 이야기는 전개될 수 없다. 아이의 존재는 일단 제쳐 두고 두 사람의 감정에 충실했을지도 모른다.
이야기가 가볍고 빠르게 진행되어 별다른 탈 없이 재혼을 하는 여성의 이야기 정도로 인식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시대 배경은 그대로 두고 시점이 옥희가 아닌 전지적 작가였다거나 어머니나 아저씨 중 한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럼 다소 무겁고 사회적인 면이 많이 드러나는 것은 물론, 서술자의 고민이 짙게 드러나서 어두운 소설이 되었을 듯하다. 그리고 너무 많은 것을 알려서 독자가 상상하는 재미가 덜했을 것 같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유치원생이 서술함으로 인해 독자로 하여금, 두 남녀 사이에 오간 감정의 행방을 상상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 이 소설을 살린 것이 아닌가 싶다.
옥희의 서술은 지나치게 무겁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경박하지도 않게 수위 조절을 하는 효과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결국 맺어 지지 못하여 헤어지는 애절함을 나타냄으로 인해 더욱 아름다운 이야기가 완성된 것이 아닐까?
아빠가 웬 원고지 하나를 건네면서, 정리하다가 내가 어릴 때 쓴 독후감을 찾았다고 하는 바람에 놀라서 부랴부랴 읽었다. 내가 저렇게 썼었구나. (;) 그런데 왜 문장이나 그런 걸 볼 때에 난 발전이 하나도 없는 것 같지? (...) 지금 보니 새롭기도 하고, 내가 저런 단어를 알긴 알고 쓴 건가 싶은 것도 있다. 사실 중학교 1학년이 아주 어린 것도 아닌데 지금 생각하면 왜 이렇게 어리게 느껴 지는지.
그나저나 사랑손님과 어머니라고 하면 하나 생각나는 것이 있다. 저 두 사람에게 오간 편지 내용이 무엇이었을지 상상해서 쓰는 시간이 있었다. 난 아무리 생각해도 독창적인 내용을 쓸 수 없었다. 그런데 평소에 국어 성적이 나보다 좋은 것도 아니고, 책을 많이 읽는 것 또한 아니며, 전혀 친하지 않았던 한 급우가 쓴 내용은 아직까지도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 아이는 애초에 두 사람 사이에 애정 담긴 편지가 오갔다는 예상은 배제했다.
좀 오래된 일이라 문맥까지 생각나는 것은 아니지만, 대략적으로 떠올리자면 아저씨가 고향에 일이 생겨서 하숙을 그만 하고 내려가야 할 것 같다는 편지를 보냈고, 남몰래 그를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던 어머니는 섭섭한 마음을 숨기고 마지막 인사 편지를 쓴다는 내용. '옥희를 통해 삶은 달걀을 드릴게요. 차 안에서 심심하시면 드세요. 그리고 하시는 일 다 잘 되시길 바랄게요.' 저런 식이었다. 그 아이는 자습서나 소설 해설서 따위는 읽은 적이 없다고 했으며, 이 소설도 처음 접한 것이 분명했다.
난 그걸 듣고 가끔은 아예 모르는 백지 상태가 더 창의적일 수가 있다는 걸 느꼈다. 대부분 아저씨가 어떤 말투로 사랑을 고백해야 하며, 어머니는 대체 어떻게 거절을 해야 효과적으로 전달이 될까 고민하는 시간에, 그 아이는 자기 나름대로 생각한 것을 적었던 것이다.
몇 주 후에도 충격(!)적인 사건은 또 일어났다. 여러 가지 유명한 책 제목을 칠판에 적고서는 무슨 내용일지 추론을 하라는 수업이었다. 공교롭게도 거기 적힌 책은 전부 내가 읽은 것이었고, 고정적으로 박힌 이미지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새삼 느끼게 했다. 특히 안도현의 연어를 어떻게 설명하면 좋단 말인가? 기나긴 여행을 마치고 알을 낳은 후 죽어야 하는 연어의 고민과 혼란스러운 여정이 담겼다느니 난 저런 식으로 썼던 것 같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연어 내용 외엔 절대로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소설을 읽지 않은 아이들 노트에서는 별 기상천외한 답이 다 나왔다. 정말 간단하게는 연어의 생태에 대한 과학 소설, 연어를 의인화해서 쓴 동화 같은 소설, 연어라는 것은 상징적 의미이고 그걸 통해 인생을 비유하는 내용의 소설, 심지어는 연어가 관찰자가 되어 다른 대상을 논하는 소설 등. 선생님은 내 답을 보고선, 아주 족집게네. 너 이 소설들 다 읽었지? 저렇게 말하고선 돌아섰다. 난 순간 울컥해서, 책 읽은 것도 잘못이냐고! 속으로 이렇게 외쳤었다.
지금이라면 읽은 소설이라도 다른 시선으로 생각해서 충분히 꾸며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그 당시엔 그게 되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 선생님에 대한 반발심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항상 내가 읽은 책 가지고 저런 식의 토론을 하면서 날 곤란하게 만드는 건 물론, 내가 쓴 글은 필요 이상으로 직설적이라고 아이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말하고, 심지어는 백일장에서 다른 선생님들이 내 글을 뽑았는데 자기가 뺐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그러고 보니 점수도 완전 최악으로 줬잖아! (예전 일이지만, 다시 생각하니 화나네.)
에, 그나저나 이야기가 왜 여기까지 진행이 된 거지? 이러다가 저 선생님 때문에 화나서 잠시 글도 안 쓰고 반항아 행세를 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면 곤란한데. (벌써 했다 이 녀석아!) 사람마다 보는 관점이 다르니 그럴 수도 있지 이렇게 생각하고 내가 쓰고 싶은 글을 계속 쓸 것을, 왜 그랬지? 지금 생각하면 억울. 주위 어른들 말 듣자면 내가 어릴 때 자존심이 정말 셌다고 하는데, 저건 자존심 이전에 상당히 상태가 나쁜 인간이었잖아!
그렇지만, 아직 예민한 중학생이었는데 아이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글과 그 내용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면 누가 상처를 안 받고 절망을 안 하겠냐고! 이러면서 나름대로 합리화. 그나저나 오늘의 요점은 우연히 중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쓴 독후감을 발견해서 옮겼다는 것!